한식 읽기 좋은 날
생생한 원형의 한점, 육회
컬러풀 한식
도축장에서 몇 시간 내 받아온 고기를 슥슥 썰어낸다. 눈으로 보아도 그대로 전해지는 쫀쫀한 찰기와 신선한 기운. 암적색 고기를 입에 넣으면 녹진하게 혀끝에 감칠맛이 맴돈다. 육고기를 손질해 날 것 그대로 먹는 육회는 고기 원형의 맛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 우리 전통 음식이다.
해외 팝 스타, 할리우드 스타들의 내한 코스 중 하나가 된 광장시장 한국 미식 투어에서 육회는 빠질 수 없는 메뉴다. 날것이 익숙하지 않은 이들마저 ‘어메이징’을 외치게 한 육회의 매력은 무엇일까?
계층을 막론하고 즐긴 생고기 문화
육회는 동아시아 삼국 중 특히 우리나라에서 발달한 식문화다. 삼국시대 중국의 영향 혹은 유목민의 사냥 식습관에 영향을 받아 날고기를 먹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기록에 따르면 고려시대 육식을 즐기지 않는 불교 문화 아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육식은 건강 회복을 위해, 부모에 효성을 다하기 위해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이어져 왔다. 궁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고려 말에 이르러서는 상당한 숫자의 소를 사육하고 도축해 고기를 수출한 기록이 있으며 다양한 계층에서 소나 말고기를 비롯해 돼지, 닭, 꿩, 기타 사냥 육고기 등을 날것으로도 먹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 말 편찬된 저자 미상의 조리서 <시의전서(是議全書)>나 조선 후기 궁중에서 왕실에 진찬한 기록을 담은 <진찬의궤(進饌儀軌)> 등에는 육회 만드는 법, 육고기의 내장을 날것으로 먹는 갑회 만드는 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큰 제사, 궁중 연회 등에도 소의 살코기와 내장을 날것으로 올렸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처럼 날고기는 계층을 막론하고 건강과 안녕을 바라며 즐기는 보양 음식이었다.
영롱한 붉은빛, 혀를 감싸는 쫀득한 풍미
고기가 극히 신선할 때 날 것 그대로 먹는 육회는 영양소와 효소 등이 그대로 함유되어 있고 재료 자체의 맛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음식이다. 고기 단백질은 불에 익는 순간 단백질 응고로 질겨지지만 기름기가 없는 부위를 사용하는 육회는 불에 익힌 고기보다 부드러우면서 담백하고 씹을수록 고소한 맛을 느낄 수 있다.
육회는 생고기의 싱싱한 맛을 해치지 않기 위해 양념을 세지 않게 하여 깔끔한 술을 곁들이는 주안상이나 교자상에도 잘 어울린다. 신선도가 중요하기에 겨울철에 주로 먹었으며 설날에 먹는 음식이기도 했다.
각양각색 지역별 육회 문화
서울과 경상남도 진주는 20세기 초반 전국에서 가장 먼저 도살장이 형성된 덕분에 그 인근으로 식육식당이 자리잡았고 품질 좋은 신선한 육회를 즐겨 먹을 수 있었다. 진주의 명물인 육회비빔밥의 역사도 이때부터 시작됐다.
육회는 오늘날까지 각 지역마다 다양한 종류와 방식으로 즐겨 먹는 향토음식으로서 그 맥을 잇고 있다.
# 소고기 회와 갑회
소고기 육회는 육질의 결이 곱고 연한 우둔살이나 다른 부위에 비해 지방이 적은 대접살을 주로 사용한다. 가장 대중적인 육회는 소고기를 가늘게 썰어 간장 양념에 버무린 후 잣가루를 뿌려 배와 마늘을 곁들여 즐기는 형태다. 전라도에서는 고기를 소금 양념에 무쳐 청포묵과 미나리 등을 곁들이거나 기호에 따라 고추장에 버무리기도 한다.
생고기에 아무런 양념을 하지 않고 회처럼 얇고 넓게 포 뜨듯 썰어 즐기기도 하는데 전라도 지방에서는 생고기 또는 육사시미라 하고 대구에서는 뭉티기라고 부른다. 뭉텅 썰어 냈다는 뜻으로 꽃처럼 펼쳐낸 고기는 신선도를 증명하듯 납작한 접시에 찰딱 달라붙어 뒤집어도 떨어지지 않는다. 소의 살코기 외에 내장인 간, 천엽, 양을 날것으로 소금 양념에 찍어 먹는 갑회는 서울과 경기도 지역에서 주로 즐긴다.
# 말고기 회
초원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말 떼의 풍경. 제주는 고려시대부터 본격적으로 말 사육을 하여 말의 고장으로 불리는 만큼 말고기도 발달했다. 일찌감치 말은 식용보다 군용 또는 교통수단 이후에는 경주마로 쓰였기에 소처럼 식재료에 많이 사용하진 않았으나 제주에서 음식 문화가 이어져오며 지금은 제주에서만 맛볼 수 있는 향토음식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말고기 회는 소고기와 마찬가지로 무침과 넓적하게 저민 사시미 형태 두 가지로 조리해서 먹는다. 보다 탄탄하고 담백한 질감의 말고기 회 역시 신선도와 비육 환경이 중요하기에 제주에서는 식용으로 기른 제주말을 판매하는 ‘제주 말고기 판매 인증점’을 별도로 운영하고 있다.
# 닭고기 회
굽고 튀기고 찌고 볶고 다양하게 조리해 먹는 닭 역시 회로 즐길 수 있다. 광주나 순천, 목포 등 전라남도 지역에서 맛볼 수 있는 닭육회는 전라도를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는 생소한 음식이지만 그 역사는 말고기만큼이나 오래 됐다. 닭 역시 신선도가 핵심이기에 주문이 들어오면 즉시 닭을 잡아 회를 뜨는 방식으로 품질을 유지한다.
대개 닭가슴살 부위를 회로 먹고 간혹 특수부위인 닭똥집, 간, 발을 회로 만들어 먹기도 하는데 오독오독한 식감의 생 똥집은 미식가들에게 별미로 꼽힌다. 쪽파를 송송 썰어 무친 회를 기름장에 찍어 먹거나 생닭가슴살을 고추장 양념에 양파와 함께 매콤하게 버무려내는 등 집마다 개성을 살린 조리법이 특징이다.
# 꿩고기 회
꿩은 고려시대 닭보다 오히려 자주 소비된 재료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주요 단백질 공급원으로 꿩을 사고 팔았다. 그러나 대부분 야생에서 사냥해야 하기에 시간이 흐르며 사육이 가능한 닭으로 대체된 것이다. 꿩은 지방이 적고 단백질 함량이 높아 육질이 탄탄하다. 겨울철 꿩을 잡아 내장을 빼고 눈이나 얼음 위에 놓아 얼린 다음 단단해진 살을 얇게 썰어 초장과 생강, 파를 넣어 동치회(凍雉膾)를 먹었다고 한다.
현재는 충주 수안보 인근에서 꿩요리가 유명하며, 꿩요리 기능 보유자가 운영하는 꿩 전문점에서는 육회, 초밥, 불고기, 수제비, 만두, 전 등 코스요리로 다양한 꿩요리를 맛볼 수 있다. 가장 처음으로 등장하는 꿩회는 부드러운 맛이 별미인 가슴살로 만들며 식탁에 오르면 10분 이내에 먹어야 한다.
한식의 다양성을 대변하는 육고기 회
육고기를 날것으로 즐기기 위해서는 제약이 많다. 첫째 신선도가 생명이고 냄새, 질감, 위생을 고려하여 부재료와 양념을 적절히 배합해야 한다. 그럼에도 날것을 먹는 문화를 배제하지 않고 영양, 효소, 맛을 보존하며 우리만의 미식 세계로 발전시켜 온 육회 문화는 한식의 다양성과 우수성을 대변한다.
불을 사용하지 않고 즐기는 육고기의 미학은 절제됐지만 다채로운 맛에 있다. 소주 한잔에 육회 한점, 코끝 시린 겨울을 더욱 사랑하게 해줄 육회의 이모저모를 경험해보자.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의식주생활사전>(국립민속박물관, 2018), <우리나라 육회의 시대별 조리학적 고찰>(박경란, 한국생활과학회,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