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 읽기 좋은 날

2021
43

Vol 46. 팥의 재발견

하늘 아래 가장 편안한 도시, 천안

한식 기행

2021/11/29 19: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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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은 하늘 아래 살기 편안한 곳(하늘 천(天), 편안할 안(安))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 교통의 중점으로 중부와 남부 어디서든 이동이 편리하고 자연 환경도 빼어나다. 
역사와 문화, 체험에 특화된 여행지로 다양한 볼거리가 있고, 호두과자와 병천순대 등 맛의 고장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천안하면 떠오르는 특산물이라면 단연 호두다. 견과류 중에서도 호두는 다량의 필수 지방산을 함유해 뇌를 닮은 모양처럼 뇌세포를 활발하게 하며, 무기질과 비타민 B1, A 등이 풍부하고 피부 미용과 노화 방지, 눈 건강에 효과적이다.
1290년 고려 충렬왕 시절 사신 류청신이 원나라에 수행원으로 갔다가 돌아오면서 호두나무 묘목과 열매를 가져와 묘목은 광덕사 경내에 심고, 열매는 본인 고향에 심었다고 전해진다. 본래 오랑캐의 나라에서 들여온 과실 모양이 복숭아와 닮았다고 해서 ‘오랑캐 호(胡)’와 ‘복숭아 도(挑)’를 써서 ‘호도(胡桃)’라고 했지만, 현재 표준어 규정으로는 ‘호두’가 맞다.
호두나무 시배지(처음 심은 곳)로 알려진 광덕사로 향하는 길에 ‘호두전래사적비’가 있다. 비석 머리가 마치 호두를 닮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절에 다다르자 천연기념물 제398호로 지정된 수령이 400여 년 된 호두나무가 늠름하게 서 있다. 이 나무가 처음에 심은 그 호두나무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오랫동안 살아온 나무임은 분명하다. 앙상한 가지와는 대조되는 두툼한 몸통과 뿌리가 오랜 세월을 증명한다. 매년 푸르고 무성한 잎을 자랑하며 호두가 여전히 주렁주렁 열린다니 건재한 것도 맞다. 광덕면 일대는 호두나무 26만여 그루가 자라는 호두 산지다.
지금은 어느 휴게소에나 있는 ‘휴게소 간식’의 대명사 호두과자 역시 풍부한 호두가 있었기에 탄생한 천안의 대표 먹거리다. 휴게소가 아닌 도시 곳곳에 호두과자점이 있는 곳은 천안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짧은 여행 기간 동안 천안을 누비며 호두과자점을 카페만큼이나 자주 목격했다. 유래를 찾아보니 1934년, 서양식 제과 기술을 배운 조귀금 씨가 개발해 천안 학화제과에서 판매한 것이 그 시초다. 현재도 4대째 87년 동안 이어오며 운영 중인데, 직접 팥을 삶아 앙금을 만들면서 흰 앙금까지 팥으로 쓰는 곳은 여기가 유일하다. 세월에 따라 기계가 빵을 굽지만, 기름칠하고, 반죽에 호두를 넣는 것은 아직 수작업을 고집한다.
호두과자가 휴게소 간식으로 널리 알려진 데는 역시 천안의 지리적 특성을 무시할 수 없다. 국내의 수많은 기차가 지나치고 머무르는 천안역은 전부터 정체도 심하고 대기 시간도 무척 길었다. 그래서 역전에서는 천천히 먹을 수밖에 없는 우동을 팔기도 했는데, 이때 등장한 간식이 호두과자다. 기차를 탄 승객에게 판매하며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떨치게 됐다.
항상 휴게소에서 맛보던 호두과자를 번듯한 가게에서 만나니 색다른 기분이다. 여러 호두과자점을 지나치다 한 곳에 들러 한 상자를 구매했다. 한알 한알을 정성스럽게 포장해 놓았다. 한 입 베어 물자 커다란 호두가 씹힌다. 지금까지 먹던 호두과자가 앙금만 가득했다면, 천안의 호두과자는 새삼스럽게도 진짜 호두가 큼지막하게 들어 있어 더욱 고소하다.
 

 


 

천안을 상징하는 먹거리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병천순대다. 수십 개의 병천순대국집이 늘어서 있는 ‘병천순대거리(청안시 동남구 병천면 아우내순대길 33 일대)’에 들어서면 어느 집에서나 풍기는 구수한 내음에, 요즘처럼 변덕스러운 날씨에 따끈하고 부드러운 순대국이 제격일 듯싶다.
병천순대는 누린내 없이 부드럽고 깊은 국물 맛으로 유명하다. 약 60여 년 전, 병천마을 인근에 햄 공장이 들어서면서부터 선지와 채소를 듬뿍 넣어 만든 순대가 생겨났다. 처음에는 병천 장날에 한두 곳의 식당에서 순대를 팔았지만 지금은 여기저기 온통 순대일 정도로 인기와 유명세가 더해졌다. 병천순대는 다량의 선지가 들어가 부드럽고 진한 맛이 특징이다. 병천순대국은 새우젓과 다대기로 맛을 더하는데, 얼큰하고 구수한 국물이 명불허전이란 생각이 들게 한다. 순대가 가진 구수함이 가득 느껴지는 가운데, 순대국은 뜨거운 돼지육수와 어우러져 더욱 짙고 풍부한 맛이 긴 여운을 남긴다. 
순대는 현대인들의 영양식으로도 손꼽힌다. 선지에는 비타민A가 풍부해 눈 건강에 좋고, 철분과 단백질 함량도 많아 두통과 빈혈에도 아주 좋다. 순대국 한 그릇이면 마치 보약 한 첩을 먹는 것처럼 든든하고 속이 편안하다. 쌀쌀한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날씨라면 더더욱 그리워질 음식이다.
 

 


 

유관순 열사의 고향은 천안이다. 그리고 학교 수업 시간에 줄줄 외우던 유관순 열사가 주도한 1919년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 역시 천안 지역이다.
또 한 사람의 애국지사인 이동녕 선생은 천안시 목천면 출신으로 온몸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분이다. 서재필, 윤치호 등이 조직한 독립협회 회원으로 근대민권운동과 국권수호운동을 전개했고,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담했으며, 독립군 양성에도 힘을 쏟았다. 신흥무관학교의 모체인 신흥강습소의 초대 소장으로 훗날 청산리대첩 같은 항일 무장 투쟁의 주역을 길러냈다. 시골길 논밭 한가운데에 이동녕 선생 생가지와 기념관이 있다. 생가를 뒤로하고 눈밭 한가운데 이동녕 선생의 조각상이 쓸쓸하게 앉아 있다.
가까운 곳에는 유관순 열사의 생가가 자리한다. 유관순 열사 역시 천안 출신으로 3남 2녀 중 둘째 딸로 사랑을 받으며 자란 똑똑한 학생이었다. 서울 이화학당에서 공부하다 파고다 공원에서 벌어진 1919년 3·1운동에 직접 참여했고, 이후 휴교령이 내려지자 천안에 내려와 고향에서도 항일운동을 전개해야겠다는 생각에 가족, 친구, 친지들의 조직화를 꾀했다. 1919년 4월 1일 지금의 병천, 아우내 장터에서 수천 명이 참여한 만세 시위를 주도했다. 이날 유관순의 부모님이 순국했으며, 유관순 열사는 주모자로 체포돼 3년 형을 선고받았지만, 심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다음 해 1920년 9월 28일 18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생가와 가까운 곳에 자리한 유관순 열사의 기념관도 찾았는데, 각종 영상 자료와 사진, 문서뿐 아니라 재판을 받았던 재판정, 갇혀 있던 서대문 형무소를 재현한 감방에서는 유관순 열사가 감방 동료들과 지어 불렀다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고문 때문에 퉁퉁 부은 얼굴을 복원한 사진까지 남녀노소 누구나 한 번쯤 들러 유관순 열사의 짧지만 강렬하게 불타올랐던 삶을 기억하고 추모하면 좋을 공간이다. 긴 계단을 올라 추모각의 텅 비고 추운 연단에 향을 피우고 내려왔다.
 


천안 지역 열사들의 삶을 둘러보고 나니 독립기념관이 천안에 터를 잡은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압도적인 크기로 영원불멸의 민족 기상을 표현한 겨레의 탑과 태극기 815개가 휘날리는 태극기 마당, 겨레의 뿌리부터 시련, 함성, 나라를 되찾고 새 나라를 세우기 위한 민족의 노력을 망라한 전시관 6개를 둘러보고 나니 별 의식 없이 살았던 이 땅과 자유에 대한 소중함, 이를 위해 애쓴 이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게, 지금의 자리에서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호두과자점처럼 즐비한 병천순대국집에서 뜨끈한 순대국밥을 먹으며 되돌아본 천안 여행은 뜻밖의 발견과 재미, 그리고 감동으로 기억된다.
그의 흔적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면 통영국제음악당에 다다르게 된다. 4월 초 통영국제음악제와 11월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 부문이 번갈아 개최되는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가 열리는 곳이 여기다. 이곳에는 통영을 그토록 그리워한 윤이상의 묘가 있다. 사후 23년 만인, 지난해 이장된 묘는 넓고 푸르고 잔잔한 통영 앞바다를 지척에 두고 있다.
통영은 최근 국내외에서 인기 관광지로 떠오른 도시 중 한 곳이다. 바다가 가까워 신선한 해산물 음식을 잔뜩 맛볼 수 있고, 바다와 도시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케이블카, 무동력으로 트랙을 타고 속도감을 느낄 수 있는 스카이라인 루지, 골목골목이 아름다운 동피랑과 서피랑 마을까지 둘러볼 만한 곳이 많아 철거하려던 낙후된 마을 담벼락에 벽화를 그리자 입소문을 타고 사람들이 몰려든 동피랑 벽화마을. 언덕에 올라서면 동양의 나폴리라 불리는 통영항이 보인다. 오밀조밀 집들이 빼곡하고, 잔잔한 바다 위에는 배와 섬이 사이좋게 떠 있다. 골목 이곳저곳을 누비며 아기자기한 그림을 감상하는 재미가 있다.
상상해서 그리려 해도, 보고 옮기려 해도 어려운 통영의 안온하고 평화로운 풍경을 마주한 음악가가 바다와 파도에서 길러낸 음표, 소설가가 빼곡한 집을 보며 만들어낸 우리네 이야기, 절경을 글로 옮긴 시인의 단어. 이곳을 지키기 위해, 이곳을 예찬하기 위해 자기의 재능을 마음껏 펼쳐온 이들 덕분에 통영에서 이름난 예술가들이 많이 배출된 게 아닐까 생각하며 늦가을날 따듯한 통영 여행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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