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 읽기 좋은 날
파인다이닝으로 꽃 핀 한국의 미식
한식의 공간
한식이 일상적인 식탁을 넘어, 파인다이닝의 무대에서 새로운 주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한식 파인다이닝 셰프들은 발효음식, 장류 등 한국 고유의 재료나 조리법을 창의적으로 재해석하며 글로벌 미식 트렌드를 이끌고 있으며, ‘미쉐린 가이드(MICHELIN Guide)’, ‘월드 50 베스트 레스토랑(World's 50 Best Restaurants)’ 등 세계 유수의 미식 랭킹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미각과 시각,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을 넘나들며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는 한식. 글로벌 미식 시장에서 독창적인 문화와 맛을 선보이고 있는 한식 파인다이닝이 열어가는 미식의 세계를 탐험해보자.
▲ 한식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정식당(Jungsik)’의 메뉴
왕실의 정수를 담은 궁중 음식
전통의 정수를 담고 있는 한국의 궁중요리와 반가음식. 대를 이어온 전통은 오늘날 한식 파인다이닝의 기틀이 되었다. 조선 시대 왕실에서 시작된 궁중요리는 화려한 재료와 섬세한 조리법으로 왕족의 입맛을 사로잡았고, 반가에서 손님을 접대하거나 제사를 위해 정성스럽게 준비한 음식은 고유한 비법과 품격을 지니고 있었다.
▲ 조선시대 왕의 수라상을 재현한 모습.
특히, 조선시대 왕실 음식은 ‘식치(食治)’라는 철학을 바탕으로 했는데, 음식이 몸의 병을 다스리고 예방하는 등 육체 건강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의미다. 이런 차원에서 죽과 숭늉, 잡곡밥 등이 주식으로 활용됐고, 붕어찜이나 민어회 같은 특별식이 왕의 식탁에 오르기도 했다. 왕실의 이런 철학은 반가에도 전해져 조선 후기 조리법과 상차림에 큰 영향을 미쳤고, 고급 한식 문화의 뿌리가 됐다.
▲ (왼쪽부터) 궁중음식 1대 기능 보유자 한희순 상궁, 한국 최초의 근대식 조리법 안내서 <조선요리제법>
궁중음식의 조리 방법은 다양한 역사 기록과 조선의 마지막 주방 상궁 한희순의 기능 전수를 통해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다. 한희순 상궁은 1901년 덕수궁 주방 나인으로 입궁해 고종, 순종, 순정효황후를 모시며 궁중음식을 담당했다. 이후, 강의와 저술을 통해 사라질 뻔한 궁중음식을 세상에 알리는 데 힘썼으며, 그 공로로 1971년 국가무형문화재 궁중음식 1대 기능 보유자로 인정받았다.
해방 이후에는 그의 제자 황혜성이 조선왕조 궁중음식 조리법을 계승했고, 한국 최초의 근대식 조리법 안내서 <조선요리제법>을 집대성한 방신영, 한국 최초의 한식다과 전문점을 설립한 조자호 등 다양한 전문가들의 노력으로 전통이 이어져올 수 있었다.
▲ 한식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한식공간’의 메뉴. (왼쪽부터) 민어사슬적, 탕평채와 김부각
대한제국 시기를 지나 광복 이후까지 조선 고급 식문화는 요릿집을 통해 대중에게 전해졌다. 1904년 종로에 문을 연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요릿집 ‘명월관’이 대표적이다. 1920년대 요릿집은 고급음식점으로 자리 잡아 각종 모임 장소로 사용되었고, 광복 이후에도 정치인과 기업인의 회합 장소로 성황을 이뤘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 요릿집은 점차 사라지고, 그 자리를 한정식 음식점들이 대신하게 되었다.
현대 한식 파인다이닝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한식공간’을 운영하는 조희숙 셰프가 있다. ‘한식의 대모’로도 불리는 그는 호텔 한식당을 시작으로 화려한 경력을 쌓으며 셰프들에게 정신적 지주 역할이 되어왔다. 조희숙 셰프는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지는 요리는 물론 집필, 요리 수업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한식을 세계적으로 알리기 위해 힘쓰고 있다.
세계로 뻗어 나가는 한식
한식 파인다이닝은 201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한식의 전통 조리법과 플레이팅을 현대적인 방식으로 재해석한 셰프들이 등장하며 국내외에서 한식 파인다이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그 선두에는 임정식 셰프의 ‘정식당(Jungsik)’이 있었다. 그는 미쉐린 가이드 뉴욕 2스타를 받으며 큰 주목을 받았다. 친숙한 한식 재료를 획기적인 요리로 재탄생 시키며 ‘뉴 코리안(New Korean)’이라는 새로운 한식의 패러다임을 제시했으며, 이를 통해 한식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 한식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정식당(Jungsik)’의 메뉴
이후, 다양한 셰프들이 한식 파인다이닝을 세계 무대에 소개하며 저변을 넓혀 나갔다. 2014년 강민구 셰프가 문을 연 ‘밍글스(Mingles)’는 개업 2년 만에 '아시아 50 베스트 레스토랑(Asia’s 50 Best Restaurants)'에 선정된 것을 시작으로, 2024년에는 한국 레스토랑 최초 ‘월드 50 베스트 레스토랑’에 진입하며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았다. 강민구 셰프는 2024년 ‘장(Jang : The Soul of Korean Cooking)’이라는 영문책을 발간하며 한국의 장 문화와 장의 현대적인 활용법 등을 소개하기도 했다.
▲ 한식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밍글스(Mingles)’의 메뉴
최근 뉴욕에서도 한식 파인다이닝의 바람이 불고 있다. 지난해 ‘미쉐린 가이드 뉴욕 2023’엔 한식당 11곳이 이름을 올려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고, 미국 뉴욕타임스(NYT)가 선정한 ‘2024년 뉴욕 최고의 레스토랑 100곳’에는 한식당 7곳이 포함되며 활약했다. 그 중심에는 박정현 셰프의 ‘아토믹스(Atomix)’가 있다. 아토믹스는 ‘북미권 최고의 파인다이닝’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미쉐린 가이드 2스타에 이어 2024년 ‘월드 50 베스트 레스토랑’에서 세계 6위에 오른 한식 레스토랑으로, 한식의 명성을 전 세계에 알리고 있다.
아토믹스는 한국의 식재료와 조리법을 활용해 특별한 미식 경험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메뉴판에 간장(Ganjang), 다시마(Dasima)와 같은 한국어 발음 그대로 표기하거나 식기와 유니폼 등에 한국적 요소를 반영하여 한국의 문화와 정서를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있다.
공간과 경험으로 만나는 한식
한식 파인다이닝은 단순한 음식을 넘어 한국의 문화와 정서를 체험할 수 있는 총체적인 경험을 제공한다. 전통적인 맛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은 물론, 공간과 서비스, 인테리어 등 모든 요소에서 한국의 문화를 느낄 수 있도록 한다. 예를 들어, 뉴욕의 한식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오이지 미(Oiji Mi)’는 한옥의 나뭇결을 살린 인테리어, 연꽃을 모티브로 한 조명, 유기 그릇의 플레이팅 등을 통해 한국적 요소를 기품 있게 녹였다.
▲ (왼쪽부터) 뉴욕의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오이지 미(Oiji Mi)’, ‘나로(NARO)’의 인테리어
또한, 뉴욕의 ‘나로(NARO)’는 예술과 장인 정신에 뿌리를 둔 디테일로 한국의 미를 표현한다. 입구의 조각보 물고기 모빌, 조선시대 책가도와 통천문암도에서 영감을 받은 라이팅 월, 천장에 그려진 조선시대 천문도 ‘천상열차분야지도’ 등 다양한 형태로 한국의 미적 감각을 체험할 수 있다.
▲ 한식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밍글스(Mingles)'
한식은 파인다이닝을 통해 놀라운 가능성과 다양한 맛, 깊이 있는 식문화를 보여주고 있다. 덕분에 현재 뉴욕의 파인다이닝을 선도하는 것은 새롭고 창의적인 한식 파인다이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음식을 넘어 한국 문화와 정서를 함께 나누며 교두보의 역할을 하는 한식 파인다이닝의 영광은 이제 시작이다.
참고문헌 <한식문화사전, 주영하 외 4명, 휴먼앤북스, 202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울역사아카이브, 국가유산청, 각 레스토랑 공식 홈페이지 및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