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 읽기 좋은 날
Vol 58. 시간의 미학 Ⅱ, 발효 그리고 젓갈
짭조름하면서도 곰삭아 깊은 감칠맛, 젓갈
한식과 젓갈
세계 여러 나라에서 젓갈을 먹는다. 그런데 우리나라만큼 다양한 젓갈을 담그고, 다양한 요리에 활용하는 나라는 드물다. 젓갈은 한식의 구석구석에 마치 향기처럼 배어들어 있다. 맛깔스러운 하나의 반찬으로 식탁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하고, 김치나 찌개, 조림 등 음식의 조미료나 양념으로 쓰여 깊은 맛을 더한다. 김치, 장류와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발효식품으로 손꼽히는 젓갈에 대해 알아보자.
글 서동철(편집실) 참고자료 두산백과 두피디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K FOOD: 한식의 비밀>(디자인하우스)
바다의 영양을 발효하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식재료의 저장은 인류에게 지상 과제에 다름아니었을 것이다. 특히 사계절이 있는 우리나라는 겨울에 나지 않는 채소류나 먹고 남은 어패류를 오래 두고 먹기 위해 고심을 거듭했다. 가장 대표적인 저장법이 바람과 햇볕에 건조하거나, 소금이나 장류에 절이는 것이다.
젓갈은 어패류의 살·알·창자 등을 소금에 절여 발효시킨 식품을 뜻한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에 면하고 연해에는 한류와 난류가 교차해 어패류 자원이 풍부한 만큼, 이를 활용한 젓갈 문화가 발달했다. 우리나라에는 멸치를 비롯해 황석어·오징어·낙지·조기·가자미 등 생선을 이용한 젓갈이 많고, 명란·창난·갈치내장·청어알·성게알 등 생선의 내장이나 알을 이용한 젓갈도 다양하다. 그 밖에 새우·토하 등 갑각류 젓갈, 조개·굴·전복 등 조개를 이용한 젓갈 등이 있다. 소금만 넣어 만들면 젓갈, 소금의 양을 줄이고 곡물을 넣어 발효시키면 식해라고 불렀다. 게장 역시 젓갈의 일종이다. 한국문화재재단이 여러 문헌을 조사한 결과 우리나라 젓갈의 종류는 약 175종이나 되고 식해는 45종이라고 한다. 젓갈의 종류가 무려 200가지가 넘는 것이다.
‘젓갈 가게에 중이라’, ‘눈치가 빠르면 절에 가도 젓갈을 얻어먹는다’, ‘절이 망하려니까 새우젓 장수가 들어온다’ 등 젓갈과 관련된 속담을 찾아보면 재미있는 공통점이 있다. 절, 중 등이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 젓갈이 ‘고기’라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소, 돼지, 닭 등의 고기를 먹기 쉽지 않았던 시절, 젓갈은 하나의 ‘고기’로 대접을 받았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실제로 젓갈은 생선이나 조개, 갑각류의 살, 내장, 알을 재료로 삼기 때문에 아미노산과 단백질이 풍부하다. 젓갈은 자체 내의 자가분해효소와 미생물이 발효하면서 유리아미노산과 핵산 분해 산물이 상승 작용을 일으켜 특유의 감칠맛을 내며, 작은 생선의 뼈나 갑각류의 껍질은 숙성 중 연해져서 칼슘을 공급해주기도 한다. 특히 젓갈에는 라이신과 트레오닌이 많이 함유되어 있다. 이것들은 쌀을 주식으로 하는 경우 부족해질 수 있는 대표적인 아미노산이다. 또 비타민B12 등 식물성 식품을 주로 섭취하는 식사를 할 때 부족해지기 쉬운 미량 영양소들도 풍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천 년의 역사 간직한 젓갈
우리나라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는 젓갈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이다. 신문왕 3년(683년)에 왕이 왕비를 맞이할 때 보내는 결혼 예물로 쌀·술·장·육포 등과 함께 젓갈을 가리키는 ‘해’가 수록돼 있다. 왕가의 결혼 예물에 젓갈이 포함될 정도였으니 당시에는 꽤 귀한 음식이었을 것이다. 중국의 <삼국지> ‘위지동이전’ 고구려조에 보면 ‘고구려인은 채소를 먹고, 소금을 멀리서 날라다 이용하였으며, 초목이 중국과 비슷하여 장양에 능하다’고 적혀 있다. 여기서 장양이 발효음식을 총칭하는 것으로, 삼국시대 이전부터 젓갈 등의 발효음식을 만들어 먹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송나라 서긍의 여행서 <고려도경>에는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상용하던 음식이 젓갈이다’라고 기록돼 있으니, 고려시대에 이미 젓갈을 먹는 것이 보편화돼 있었다고 봐야 한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젓갈의 종류가 보다 풍성해졌고, 해안지방에서 만든 젓갈이 조선시대에 활성화된 보부상들에 의해 전국 각지로 퍼져나갔다. 조선 전기까지 젓갈은 주로 밥 반찬이었으며, 김치에는 젓갈을 사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젓갈이 김치에 들어가기 시작된 것은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고추가 전래된 이후이다. 젓갈이 양념용 젓갈과 반찬용 젓갈로 분류되기 시작하고, 김치를 담글 때 고추와 함께 젓갈을 사용하게 된다. 고추가 젓갈의 비린내를 감소시키고, 젓갈은 김치의 감칠맛을 더욱 높였기 때문이다.
젓갈의 다양한 종류
이처럼 수천 년의 역사를 통해 이어져 온 젓갈은 담그는 방법에 따라 크게 소금으로 만드는 젓갈, 소금과 고춧가루를 섞어 만드는 양념 젓갈, 간장으로 만드는 젓갈로 구분한다. 우리나라 젓갈은 소금만으로 젓갈을 담그는 염해법을 많이 사용하는데, 일반적으로 생선을 소금물에 씻어 물기를 제거한 후에 소금을 뿌려 발효시키는 것이다. 상온에서 2~3개월 정도 숙성시키면 원재료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한 젓갈이 되고, 6개월 이상 오래 숙성시켜 갈고 여과하여 액체만 얻어내면 액젓이 된다. 소금을 적게 쓰고 곡물을 첨가하면 식해라 부른다.
양념젓갈은 말 그대로 어패류에 소금뿐 아니라 고춧가루, 마늘, 파 등의 양념을 넣어 만들어 주로 반찬으로 먹는 젓갈이다. 주로 명태의 알과 내장인 명란과 창난, 대구의 아가미가 많이 쓰이며, 오징어와 낙지 등 두족류나 조개류로도 많이 담근다. 간장으로 담그는 젓갈은 간장게장이 대표적이다. 끓여서 식힌 간장에 깨끗하게 손질한 게를 넣어 담그는데, 꽃게로 만들면 꽃게장, 민물 게로 만들면 참게장이라 부른다. 새우, 전복 등으로도 담가 별미로 즐긴다.
지역적으로도 젓갈의 종류를 나눌 수 있다. 우리나라는 3면이 바다로 지역마다 잡히는 어패류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먼저 서해안은 갯벌이라는 생태계의 보고가 있고, 염전이 발달하며 비교적 풍족한 소금으로 젓갈의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는 것이 특징이다. 서산의 어리굴젓, 목포의 농게젓 등을 비롯해 꼴뚜기젓, 꽃게젓, 낙지젓, 조개젓, 소라젓 등이 유명하다.
남해안은 한류와 난류가 교차해 어족 자원이 풍부한 동시에 날씨가 따뜻해 짠맛이 강한 젓갈이 많다. 제주도의 게우젓(전복내장젓)을 비롯해 갈치속젓, 창난젓 등 어패류의 내장으로 만든 젓갈이 많은 것도 특징이다. 세발낙지젓, 한치젓을 담그는 지역들도 있다. 동해안은 사계절 내내 어류 자원은 풍부한 반면 소금은 부족한 지역이다. 때문에 가자미식해, 명태식해 등 소금을 적게 써서 저장 기간을 짧게 하고 곡물을 첨가한 식해가 발달했다. 명태가 많이 잡히던 시절 명태를 손질하고 남은 내장과 알로 만든 명란젓과 창란젓도 강원도의 대표 젓갈로 꼽히며, 이외 서거리젓(명태 아가미젓), 가리비젓, 오징어젓, 꼴두기젓 등이 흔하다.
젓갈의 맛을 아는 이라면 벌써 입 안에 침이 고였을 터. 오늘 식탁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 한 공기에 짭조름하면서도 감칠맛을 자랑하는 젓갈을 주인공으로 식탁을 차려보는 것은 어떨까.